상
‘상이 맺힌다’는 영문으로 좀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문장이다.1 대다수는 이 “상"을 이미지(image), 모양(shape), 모습(figure)으로 번역하는데, 문맥상 틀리지 않을 뿐 정확한 뜻이라고 짚기 모호한 부분이 있다. ‘상’을 명확히 지칭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한자어를 살펴보면 대략적인 어원을 찾아볼 수 있지만, 한자어 자체로 명확히 의미하는 바를 내리기 어렵다.
이동훈의 작업에 등장하는 소재는 그의 망막에 맺힌 상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세잔이 화병과 사과 정물을 수없이 그린 이유가 대상을 묘사하는 게 아닌 감각을 실현하기 위한 것처럼, 이동훈은 소재를 선택하고 표현하여(깎아 내고 그려내어) 형식성의 실험값을 도출한다. 그리고 이 형식성의 실험은 그가 대상을 접근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망막의 감각과 결부된 조형적 실험에 가깝다. 작가의 초기작 <화병>(2018)과 <고양이와 박새와 풀>(2019)을 필두로 2018-20년대의 작품을 살펴보면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자연물의 소재가 일관되게 등장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꽃, 화병, 고양이, 인물 등의 대상을 관찰하면 고전 정물화의 접근과는 유사하지만, 분명히 다른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소재에 대한 실마리를 따라가며 이동훈의 ‘상’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상과 표면의 충돌 속 생긴 값
시각예술의 매체는 수많은 디바이스 환경의 변화로 매시간 다양한 전환의 시도를 도전한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회화의 경우도 다름없는 상황을 진전하고 있다. 동시대 회화는 재현의 기능을 역사에 묻어둔 채 특정 서사와 맞아 떨어지는 표현의 인과성을 평면에 담고자 노력한다. 이처럼 구상과 비구상의 구별이 무색한 시점에서, 이동훈의 작업은 20세기 모더니티의 미적 단위와 회화의 형식성을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연구한 흔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작가는 대상을 그리고 작업 내부에 서사를 개입시키는 방식에서 스스로 회의를 느꼈다고 밝힌다. 이 성찰적 태도는 곧 작가 본인이 소재를 선택하는 이유에서 반영되어 드러난다. 가령 작가의 말을 빌려 고양이와 꽃은 작품 내부에 기입되는 알레고리를 끊어주는 역할인데, 이는 이미지의 자연적 도상(icon)을 의도적으로 분해하고자 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곰브리치는 시각적 이미지를 하나의 기호로 읽고, 언어적 기호와 시각적 이미지의 차이를 중요하게 여겼다. 언어와 달리 미술은 창작자 개인의 문화적, 사회적 재현 체계의 기호들로 소통하기에 미시적인 기호로 작품 내부에서 작동하는 상징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이동훈 작업에 등장하는 소재는 대상 그 자체로 작동하는 기호가 없이, 망막에 맺힌 일상의 사물로 재료와 표현에 대한 실험을 일구어가는 ‘상'이다.
접촉하는 표면, 몸체
이동훈은 망막에 맺힌 ‘상'을 나무 표면에 착지시키듯 조형(造形)하고, 만들어낸 덩어리를 다시 평면 위에 상을 새긴다. 작가는 조각과 회화 두 방면의 매체를 오가며 망막에 맺힌 상을 두 영역의 여과 장치 과정을 거쳐 형성한다. 이 두 영역(매체)을 오가는 작업 과정은 일종의 물성 실험에 가까운데, 특히 망막에 비친 (고정된 또는 움직이는)상이 특정 물성에 닿았을 때 변화하는 지점을 포착하여 ‘상’과 물성의 간극을 살펴보기도 한다. 일례로 < 알스트로메리아, 카네이션과 옥시>(2022)와 <ETA>(2024)조각을 제작하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우선 전기톱으로 나무의 거친 표면을 파고들어 무거운 덩어리를 도려낸다. 도려내진 나무의 양감을 기점으로 작가는 끌을 이용해 작은 양감들의 살갗을 표현한다. 결국 아크릴 물감으로 얹혀지는 나무의 거친 살갗에 프로타주 기법처럼 까슬한 표면의 질감이 새겨지는데, 이는 재료의 표면을 이해하는 과정이자 동시에 목재의 물성적인 몸체 자체로 ‘상'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동훈은 종이 조각에서도 목조 조각의 물성 실험과 동일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는 목재 물성을 대하는 태도로, 종이의 특성을 관찰하고 손끝으로 접촉하며 입체적인 독해를 한다. 종이는 목재보다 훨씬 가볍고 유연한 물성으로 확연히 다른 양감을 가진다. 추측 건대, 작가는 종이의 지면이 접히고 뒤틀려 형성된 입체면을 보며 표면에 대한 실험 욕구가 차 올랐을 것이다.
<Compilation 2>(2023)의 종이 조각들은 마치 빨랫줄에 널어진 옷가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살구색 색감으로 덮힌 조각은 누군가의 살갗을 떠올리게 되는데, 도마뱀이 껍질을 탈피하듯 종이 조각은 껍질로부터 형상을 발견한 모습이다. 목조 조각은 이와 반대로 몸체에서 형상을 발견한다. 피그말리온이 상아 덩어리에서 물성안에 내재된 형상을 꺼내는 방식처럼 말이다. 따라서 사실상 작가가 회화와 조각을 병행하고 두 매체 사이의 간극을 주목했다고 하는 것은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한 편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이동훈이 전통적인 두 매체(조각과 회화)에 접속하여 질료의 본질을 느끼고 동시에 질료의 표면 위에 맺혀지는 상을 조각한다는 점에서 회화와 조각은 동일선상의 지평에 놓여있다.
움직이는 상
한편 이동훈은 무심하게 미디어 환경에 노출된 자신의 망막을 작업에 반영한다. 물성과 표현 기법 사이를 오가며 도구의 쓰임과 함께 직관적으로 망막의 감각을 수용하기도 한다. 2020년의 작업 중 <놀이>(2020)를 기점으로 작가의 작업에 인물이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 동식물에 이어 인물로 나아가는 자연스러운 순리를 이야기한다. 인물이 등장한 계기는 단순하지만 꽤 고찰할 지점이 있다.
20세기 화가들의 작품들을 떠올리면 특정 장르화에 치우치지 않게 동식물, 풍경, 인물의 범주를 답습하듯 그렸다. 물론 개인의 역사를 파헤치면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테지만, 가장 보편적인 소재의 선택은 아마 일상의 사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동훈도 마찬가지로 일상의 만물을 소재 삼았는데, 인물은 다른 범주에서 벗어난 독특한 동적인 양태를 담아내고 있다. 고양이가 눈앞에서 움직이는 모습과 달리 케이팝 댄스를 추는 아이돌의 모습은 미디어로 감각하는 움직임의 형태인데, 이는 스크린이라는 평면 레이어를 거쳐 망막에 비치는 상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의 지각은 실제의 흐름이나 운동을 신체의 물리적 장치(망막)를 통해 혹은 지식의 장치(사유)로 스크린샷을 찍듯이 외부의 자극을 수용한다. 특히 그는 저서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 1896)에서 ‘이미지’를 지각과 현실 사이의 중간적 존재로 설명한다. 이는 물질적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이미지'로 존재하며, 이미지와 운동을 분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감각기관은 실제의 움직임을 사진의 단면처럼 포착했다고 느끼지만, 실상 이것은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다. 이것을 베르그송은 ‘영화적 환영(the cinematographic illusion)’으로 부르는데, 이미지는 순간적인 파편으로 우리가 부르는 이름에 불과하며, 이 파편들은 장치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정지된 이미지인 셈이다.
이동훈이 케이팝 댄스를 추는 아이돌의 움직임을 작업에 반영하는 방식은 우리가 미디어에서 움직임을 지각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미디어 상의 이미지는 실제의 운동이 아니라, 수많은 정지된 프레임이 빠르게 연결된 환영에 불과하다. 따라서 작가가 표현하는 ‘움직이는 상’은 단순한 운동의 재현이 아니라, 운동하는 수많은 순간적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다. 이동훈은 움직임의 상을 정적인 물성인 회화와 조각에 그 연속성을 포착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비약적인 시도가 아니다. 케이팝 안무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모두 미디어 환경 속 스크린 평면을 거쳐 투과되기에, 동적인 이미지 파편은 다시 캔버스, 목재, 종이의 장치로 운동하는 이미지인 셈이다. 일련의 운동성과 평면성의 매커니즘은 그의 작업에서 순환한다. 그러므로 이동훈의 작업은 지각되는 파편적 상이 만들어내는 환영에 대한 일종의 성찰이며, 그 과정에서 상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화하는지를 되짚어보게 된다.
다시 ‘상’으로
다시 이동훈의 망막에 맺힌 ‘상’과 입체와 평면의 물체로 투과된 ‘상’을 되짚어보자. 결국 두 '상'은 물성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다. 종이가 지닌 물리적 특성과, 작가의 감각이 만나는 지점에서 ‘상’은 새롭게 출현한다. 이를테면 ‘상’은 망막의 수정체를 거치듯, 움직이는 동작들이 스크린이라는 수정체를 거쳐 눈에 맺히기도 한다. 나아가 나무 표면에 다시점(多時點)의 이미지를 투과하거나, 종이를 접고 자르며 그 안에서 새로운 형상을 발견하는 순간 ‘상’은 단순히 고정된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움직이는 감각적 결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동훈의 작업에서 ‘상’은 단순히 보이는 것을 그대로 담는 것이 아니라, 그 보는 행위 자체에서 형성되고, 물성, 감각, 시간의 축적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유동적이고 열린 이미지다. 작가는 물성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미술사 내부에서 순환하는 미적 형식을 돌이키며, 기실 자신의 형식 체계를 구축한다.
1 여기서 ‘상’은 빛이 망막 수정체를 통과하여 투사된 상이다.
윤지희 (독립 큐레이터)
상
‘상이 맺힌다’는 영문으로 좀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문장이다.1 대다수는 이 “상"을 이미지(image), 모양(shape), 모습(figure)으로 번역하는데, 문맥상 틀리지 않을 뿐 정확한 뜻이라고 짚기 모호한 부분이 있다. ‘상’을 명확히 지칭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한자어를 살펴보면 대략적인 어원을 찾아볼 수 있지만, 한자어 자체로 명확히 의미하는 바를 내리기 어렵다.
이동훈의 작업에 등장하는 소재는 그의 망막에 맺힌 상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세잔이 화병과 사과 정물을 수없이 그린 이유가 대상을 묘사하는 게 아닌 감각을 실현하기 위한 것처럼, 이동훈은 소재를 선택하고 표현하여(깎아 내고 그려내어) 형식성의 실험값을 도출한다. 그리고 이 형식성의 실험은 그가 대상을 접근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망막의 감각과 결부된 조형적 실험에 가깝다. 작가의 초기작 <화병>(2018)과 <고양이와 박새와 풀>(2019)을 필두로 2018-20년대의 작품을 살펴보면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자연물의 소재가 일관되게 등장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꽃, 화병, 고양이, 인물 등의 대상을 관찰하면 고전 정물화의 접근과는 유사하지만, 분명히 다른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소재에 대한 실마리를 따라가며 이동훈의 ‘상’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상과 표면의 충돌 속 생긴 값
시각예술의 매체는 수많은 디바이스 환경의 변화로 매시간 다양한 전환의 시도를 도전한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회화의 경우도 다름없는 상황을 진전하고 있다. 동시대 회화는 재현의 기능을 역사에 묻어둔 채 특정 서사와 맞아 떨어지는 표현의 인과성을 평면에 담고자 노력한다. 이처럼 구상과 비구상의 구별이 무색한 시점에서, 이동훈의 작업은 20세기 모더니티의 미적 단위와 회화의 형식성을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연구한 흔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작가는 대상을 그리고 작업 내부에 서사를 개입시키는 방식에서 스스로 회의를 느꼈다고 밝힌다. 이 성찰적 태도는 곧 작가 본인이 소재를 선택하는 이유에서 반영되어 드러난다. 가령 작가의 말을 빌려 고양이와 꽃은 작품 내부에 기입되는 알레고리를 끊어주는 역할인데, 이는 이미지의 자연적 도상(icon)을 의도적으로 분해하고자 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곰브리치는 시각적 이미지를 하나의 기호로 읽고, 언어적 기호와 시각적 이미지의 차이를 중요하게 여겼다. 언어와 달리 미술은 창작자 개인의 문화적, 사회적 재현 체계의 기호들로 소통하기에 미시적인 기호로 작품 내부에서 작동하는 상징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이동훈 작업에 등장하는 소재는 대상 그 자체로 작동하는 기호가 없이, 망막에 맺힌 일상의 사물로 재료와 표현에 대한 실험을 일구어가는 ‘상'이다.
접촉하는 표면, 몸체
이동훈은 망막에 맺힌 ‘상'을 나무 표면에 착지시키듯 조형(造形)하고, 만들어낸 덩어리를 다시 평면 위에 상을 새긴다. 작가는 조각과 회화 두 방면의 매체를 오가며 망막에 맺힌 상을 두 영역의 여과 장치 과정을 거쳐 형성한다. 이 두 영역(매체)을 오가는 작업 과정은 일종의 물성 실험에 가까운데, 특히 망막에 비친 (고정된 또는 움직이는)상이 특정 물성에 닿았을 때 변화하는 지점을 포착하여 ‘상’과 물성의 간극을 살펴보기도 한다. 일례로 < 알스트로메리아, 카네이션과 옥시>(2022)와 <ETA>(2024)조각을 제작하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우선 전기톱으로 나무의 거친 표면을 파고들어 무거운 덩어리를 도려낸다. 도려내진 나무의 양감을 기점으로 작가는 끌을 이용해 작은 양감들의 살갗을 표현한다. 결국 아크릴 물감으로 얹혀지는 나무의 거친 살갗에 프로타주 기법처럼 까슬한 표면의 질감이 새겨지는데, 이는 재료의 표면을 이해하는 과정이자 동시에 목재의 물성적인 몸체 자체로 ‘상'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동훈은 종이 조각에서도 목조 조각의 물성 실험과 동일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는 목재 물성을 대하는 태도로, 종이의 특성을 관찰하고 손끝으로 접촉하며 입체적인 독해를 한다. 종이는 목재보다 훨씬 가볍고 유연한 물성으로 확연히 다른 양감을 가진다. 추측 건대, 작가는 종이의 지면이 접히고 뒤틀려 형성된 입체면을 보며 표면에 대한 실험 욕구가 차 올랐을 것이다.
<Compilation 2>(2023)의 종이 조각들은 마치 빨랫줄에 널어진 옷가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살구색 색감으로 덮힌 조각은 누군가의 살갗을 떠올리게 되는데, 도마뱀이 껍질을 탈피하듯 종이 조각은 껍질로부터 형상을 발견한 모습이다. 목조 조각은 이와 반대로 몸체에서 형상을 발견한다. 피그말리온이 상아 덩어리에서 물성안에 내재된 형상을 꺼내는 방식처럼 말이다. 따라서 사실상 작가가 회화와 조각을 병행하고 두 매체 사이의 간극을 주목했다고 하는 것은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한 편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이동훈이 전통적인 두 매체(조각과 회화)에 접속하여 질료의 본질을 느끼고 동시에 질료의 표면 위에 맺혀지는 상을 조각한다는 점에서 회화와 조각은 동일선상의 지평에 놓여있다.
움직이는 상
한편 이동훈은 무심하게 미디어 환경에 노출된 자신의 망막을 작업에 반영한다. 물성과 표현 기법 사이를 오가며 도구의 쓰임과 함께 직관적으로 망막의 감각을 수용하기도 한다. 2020년의 작업 중 <놀이>(2020)를 기점으로 작가의 작업에 인물이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 동식물에 이어 인물로 나아가는 자연스러운 순리를 이야기한다. 인물이 등장한 계기는 단순하지만 꽤 고찰할 지점이 있다.
20세기 화가들의 작품들을 떠올리면 특정 장르화에 치우치지 않게 동식물, 풍경, 인물의 범주를 답습하듯 그렸다. 물론 개인의 역사를 파헤치면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테지만, 가장 보편적인 소재의 선택은 아마 일상의 사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동훈도 마찬가지로 일상의 만물을 소재 삼았는데, 인물은 다른 범주에서 벗어난 독특한 동적인 양태를 담아내고 있다. 고양이가 눈앞에서 움직이는 모습과 달리 케이팝 댄스를 추는 아이돌의 모습은 미디어로 감각하는 움직임의 형태인데, 이는 스크린이라는 평면 레이어를 거쳐 망막에 비치는 상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의 지각은 실제의 흐름이나 운동을 신체의 물리적 장치(망막)를 통해 혹은 지식의 장치(사유)로 스크린샷을 찍듯이 외부의 자극을 수용한다. 특히 그는 저서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 1896)에서 ‘이미지’를 지각과 현실 사이의 중간적 존재로 설명한다. 이는 물질적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이미지'로 존재하며, 이미지와 운동을 분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감각기관은 실제의 움직임을 사진의 단면처럼 포착했다고 느끼지만, 실상 이것은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다. 이것을 베르그송은 ‘영화적 환영(the cinematographic illusion)’으로 부르는데, 이미지는 순간적인 파편으로 우리가 부르는 이름에 불과하며, 이 파편들은 장치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정지된 이미지인 셈이다.
이동훈이 케이팝 댄스를 추는 아이돌의 움직임을 작업에 반영하는 방식은 우리가 미디어에서 움직임을 지각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미디어 상의 이미지는 실제의 운동이 아니라, 수많은 정지된 프레임이 빠르게 연결된 환영에 불과하다. 따라서 작가가 표현하는 ‘움직이는 상’은 단순한 운동의 재현이 아니라, 운동하는 수많은 순간적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다. 이동훈은 움직임의 상을 정적인 물성인 회화와 조각에 그 연속성을 포착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비약적인 시도가 아니다. 케이팝 안무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모두 미디어 환경 속 스크린 평면을 거쳐 투과되기에, 동적인 이미지 파편은 다시 캔버스, 목재, 종이의 장치로 운동하는 이미지인 셈이다. 일련의 운동성과 평면성의 매커니즘은 그의 작업에서 순환한다. 그러므로 이동훈의 작업은 지각되는 파편적 상이 만들어내는 환영에 대한 일종의 성찰이며, 그 과정에서 상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화하는지를 되짚어보게 된다.
다시 ‘상’으로
다시 이동훈의 망막에 맺힌 ‘상’과 입체와 평면의 물체로 투과된 ‘상’을 되짚어보자. 결국 두 '상'은 물성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다. 종이가 지닌 물리적 특성과, 작가의 감각이 만나는 지점에서 ‘상’은 새롭게 출현한다. 이를테면 ‘상’은 망막의 수정체를 거치듯, 움직이는 동작들이 스크린이라는 수정체를 거쳐 눈에 맺히기도 한다. 나아가 나무 표면에 다시점(多時點)의 이미지를 투과하거나, 종이를 접고 자르며 그 안에서 새로운 형상을 발견하는 순간 ‘상’은 단순히 고정된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움직이는 감각적 결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동훈의 작업에서 ‘상’은 단순히 보이는 것을 그대로 담는 것이 아니라, 그 보는 행위 자체에서 형성되고, 물성, 감각, 시간의 축적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유동적이고 열린 이미지다. 작가는 물성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미술사 내부에서 순환하는 미적 형식을 돌이키며, 기실 자신의 형식 체계를 구축한다.
1 여기서 ‘상’은 빛이 망막 수정체를 통과하여 투사된 상이다.
윤지희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