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게 만들기, 재미있게 그리기 / 유지원

이동훈은 일상에서 집히는 소재를 채색 목재 조각이나 종이 커팅, 그리고 평면으로 구상한다. 이때 일상적인 소재에는 유구한 미술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정물부터 애정하는 고양이와 역동적인 케이팝 아이돌의 동세 등이 포함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소재가 거시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모종의 통찰로 이어지기보다 지극히 구체적인 영역에 머문다는 점이다. 작품의 형태와 색, 질감과 무게를 뜯어보는 데 오는 즐거움은 특정한 입장으로 번역되기를 저항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무엇을 만들고 그리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회화를 주 매체로 작업해 오다 우연한 계기로 입문하게 된 목재 조각의 첫 소재는 화병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의미를 담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을 때, 게다가 이미 하늘 아래 새로운 그림이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때, 이동훈은 “화가들이 그림을 연습하기 위해 화병을 정물 삼아 그렸던 것처럼” 나무를 깎아 화병을 만들었다. 관습적인 소재와 새로이 손에 익히기 시작한 재료의 조합은 작가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명분을, 다시 말해 작업이 지속적으로 생산될만한 구조적 장치를 제공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림을 떠난 우회로로써 그림을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화병〉(2018)은 잣나무를 도려내어 화병의 형태가 되었지만 애초에 그 사물 자체에 근접하려던 뜻이 없었던 것처럼, ‘나무 조각’으로 마무리되게끔 거친 상태로 완료된다. 한점 한점 살점이 떨어져 나간 흔적을 그대로 남긴 표면은 입체 작품에 흥미로운 결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목재를 조각하는 순간조차 페인터이기를 쉬지 않는 이동훈에게, 수없이 많은 평면을 제공한다. 단 하나의 직물 평면 위에 완결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페인터의 과제는 이제 산발적으로 펼쳐진 작은 표면 각각에 내릴 선택의 조합으로 전환된다. 입체물이 지닌 음영을 강조하거나 간과하기, 아크릴의 농도 및 두께를 조절하여 목재의 결을 숨기거나 드러내기. 이후 〈화병〉(2019), 〈선인장〉(2019), 〈화병〉(2020) 등에 전개한 변주를 미루어 보아, ‘무엇을 그리느냐’의 질문으로부터 해방된 페인터에게 이러한 계산은 퍽 즐거운 것이었으리라. 그 쾌는 곧 그 채색 조각을 마주한 내게도 전달된다. 채색 조각 주위를 돌며 감상하는 일은 온몸을 사용하는 현상학적인 경험—혹은 ‘조각적’ 감각—이라기보다 역동적인 평면 앞에서 쉼 없이 눈을 굴리는 시각적 활동에 가깝다.

채색 목재 조각을 그림으로 옮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조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마치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점을 망각한 듯—이를 맛있게 뜯어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도출된 것처럼 보인다. 조각의 모델이 된 화분을 본 적 없는 듯 그려낸 그림. 조각 면면의 촉각성이 특히 두드러진 묘사는 화분으로, 심지어 어떤 입체 오브제로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거세게 증식하는 덩어리의 단면들을 나란히 붙인 듯, 인접한 녹색 빛의 패치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태피스트리처럼, 깊이감이 소거된 모습이다. 흥미롭게도 입체주의 화풍을 상기시키는데, 다시점적 관찰을 통해 입체물을 해체, 재구성하려는 접근을 도입했다기보다 오히려 회화의 대상인 채색 조각이 앞서 살펴본 듯 조각적 특징보다 회화적 원리에 더 충실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각의 유기적 형태보다도 각 면들, 즉 직물이 아닌 굴곡진 목재 표면에 불균등하게 얹혀지거나 스미는 아크릴의 효과야말로 관찰하고 묘사하기에 흥미로운 소재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이처럼 이동훈은 나무를 깎을 때조차 회화를 벗어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입체물을 적극적으로 더듬어 가는 회화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정은 묘사의 대상이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2020년부터 작가는 케이팝 아이돌의 안무나 고양이의 동세에 주목한다. 이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컷이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분명 정물과는 다른 속성의 대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입체에 대한 평면적 접근이 두드러진다. 〈고양이와 나〉(2021), 〈Rollin’〉(2022), 〈Next Level〉(2022) 등에서 동작은 마치 다중 노출된 사진이나 한 여러 동작을 한 컷에 겹쳐 그리는 만화처럼, 평면 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도록 만드는 기법을 따른다. 들어올린 무릎 아래로 여전히 땅에 발을 붙인 다리가 뻗어 있거나 여러 손들이 상체를 휘어 감는다. 옆으로 누운 인물을 옆구리로 훑고 지나가는 고양이는 그 경로만큼 길어지고, 이를 쓰다듬는 손이 다섯 개쯤 얹혀져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은 불연속적인 형상으로 결정화된다. 보다 복잡한 구성의 채색 조각을 뒤따른 회화는 두 어 점의 캔버스에 걸쳐 펼쳐진다. 이 회화는 마치 그 입체물 자체에 캔버스를 둘러서 판화처럼 찍어낸 것처럼, 조각을 두 바퀴 돌면서 본 장면을 좌우로 펼친다. 관찰의 시간축이 도입된 평면은 대상의 핵심을 집약하기 위한 평면이라기보다 관찰과 옮겨 쓰기의 손맛을 여과없이 펼친다.

물론, 이동훈이 회화로 다루는 소재는 시대적 맥락과 적극적으로 소통한다. 종합예술인 케이팝이 세대를 불문하고 무작위적인 공동 경험을 창출해내는 광장으로 거듭나고, 반려동물을 가족의 일원이 되며 무수한 식물을 집으로 들인 세대가 출현한 시대적 풍경에 대한 일종의 지표로 해석할 여지가 농후한 것이다. 게다가 오랜 시간 미술의 매체로 사용된 목재의 질감은 매끈한 스크린을 너머 송출되는 매끈한 이미지와 충돌을 일으켜, 우회적으로 동시대성을 성취한다. 하지만 고유한 양식적 절차(stylistic process)를 구축하여 전통적 미술 매체에 충실히 기여하는 그의 회화는 주제 혹은 관념적인 영역에 대한 헌신을 거두고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영역에 집중한다.

2023년 개인전 《가벼운 안무》에서 보여준 종이 조형은 기존의 매체와 기법을 잠시 떠남으로써 이동훈의 만들기와 그리기가 재료의 속성에 기대고 있다는 점과 그 구체적인 역동에 주목한다는 점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펠트 천을 중력에 맡긴 〈무제〉(1967-1968)에서 로버트 모리스가 작가의 관념적 의도를 소거하고 재료 고유의 물질적 특성에 온전히 기대고자 한 것처럼, 이동훈의 종이 조각은 채색 목재 조각과 이에 따른 회화 작업을 통해 습득한 특유의 구상력을 발휘하되 재료의 특성에 기댄다. 쉽게 휘거나 접히고, 스스로 서기보다 중력의 방향대로 늘어지는 종류의 종이를 사용할 때는 여러 겹을 겹쳐 곡선의 리듬을 강조하고, 두껍고 거친 카드보드를 사용할 때는 오히려 목재 조각과 유사한 방식의 채색—사실 목재나 제지나 마찬가지로 나무라는 점을 암시하듯—을 보여준다.

다시 나무 조각으로 돌아오자. 2025년 연작 ‘Long Bird’는 새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목재로 포착한 것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동작이 그대로 축적되어 있다. 온화하고 누런 빛의 목재를—이전 채색 조각에 비해—매끈하게 깎아내고 채색을 생략하여 다평면의 입체가 아닌 하나의 덩어리가 출현한다. 이러한 시도는 이전과 달리 눈보다 몸이 반응하도록—어쩐지 만져보고 싶다—한다. 인체의 키 정도 높이의 조각 옆에 나란히 서 본다. 시간을 질량과 부피로 전환한 덩어리들. 우리는 새가 땅을 치고 날아가려는 그 순간을 품에 안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최근 시도는 이전 작업에 비해 확연히 ‘조각적’인 것으로 다가온다(이에 상응되는 회화 작품은 없다). 더불어 몇 년간 이어온, 케이팝을 소재로 한 채색 조각 역시 유사한 경향이 감지된다. 이전 작품에서는 형태의 변형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안무 혹은 포즈를 읽어낼 수 있었다면, 〈ETA〉(2024)나 〈Drama〉(2024)와 같은 최근 작품은 이를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인체 구도를 전혀 따르지 않은 이 덩어리들은 제목이 정직하게 밝히는 케이팝의 안무 동세를 따르기보다 이전의 작업 과정을 시뮬레이션한 후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뉴진스의 ‘ETA’의 대표적인 동작을 따라 채색 조각을 만들고, 그것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여 그림을 그린 뒤, 그 그림을 모델 삼아 다시금 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 과정이 생략된다. 하지만 이 조각들에 감행된 추상화의 과정에 이전에 조각-회화 사이를 왕복하며 복수의 시점으로부터 면면을 흩어내고 모아보는 관점이 밀도 높게 적용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처럼 작품이 가는 길을 특정한 기조에 가두지 않고 시도와 갱신을 거듭하는 점이 이동훈의 작품에 흥미를 더한다. 페인터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그리기를 지속하기 위해, 혹은 그 당위성을 스스로 설득하기 위해 새로운 재료를 탐색하고, 그 과정에서 재료가 손을 이끄는 대로, 그 종착지를 모르는 채로 따르는 일. 그 과정에서 작품은 고전에 대한 영민한 재해석이 되거나 동시대성을 성취할 수도 있다. 회화에 근접하기 위해 시작한 입체물이 어느새 그 자체로 성립되는 조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재료의 실험과 기법의 갱신을 거듭하는 현재진행형의 실천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만들기와 그리기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쓰기 앞서 두 차례의 미팅에서 우리는 현 시점에 창작자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작가가 되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신만이 구사하는 양식적 언어가 강력하거나 특정한 주제에 대한 면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담론을 형성하거나. 소위 손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길 모두 여의치 않다면, 수습할 수 없는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는 걸까? 경쟁이 가속화된 관심경제 속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반려 동물이나 식물을 키우듯 창작의 동력을 쉬지 않고 보살피는 일에 다름없다. 관찰하고 그릴 힘이 날만한 대상을 찾을 수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야 할 것이고, 그것을 만들어내려면 새로운 재료와 도구로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예술적 성취, 발전과 갱신은 만드는 맛과 그리는 재미를 잃지 않는 지속성에 붙여야 할 이름이다.


▲본 비평문은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 입주작가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