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의 작업을 통해 보게 되는, 어떤 역사적 차원과 근미래의 가능성에 관해 / 임근준

이동훈(李東勳, Rhee Donghoon, 1991-)의 조각은 자명(自明, axiomatic)하다. 여러 면에서 자명하다. 자명한 작업을 비평하는 글쓰기는 때론 무의미한 일이 되기도 한다. 여차하면, 동어반복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반복을 통해 차이를 드러내는 일은 재밌을 수도 있고, 또 유의미한 유희가 되기도 한다.

 

반면, 이동훈의 회화는 자명하지 않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작업 목표나 과정에 채 명료화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기에 그렇다. 조각에서 파생되는 회화들을 보면, 지향성(orientation)은 뚜렷이 존재하지만 아직 정체성은 불분명하다. 그러므로, ‘완성’의 양태로 귀결된 미완의 캔버스들은, 사회화 과정에 있는 십대 청소년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그림들은 조각들에게도 ‘자명하지 않은 어떤 동적 시공’을 되돌려줄 수 있다. 물론, 아직은 근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한 이야기다.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작업 세계를 평하는 일은 부질없는 노동이 되기 쉽다. 부질없는 노동이 되는 경우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청년의 작업 세계는, 평문으로 포착해놓은 모습이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라날 것이 당연하거니와, 또 그래야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지는 않다. 지적 유희 삼아 과도한 가설과 해석을 제시해놓았더니, 그걸 도약판 삼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신, 정말로 그 방향에 맞춰 가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면 크게 낙담하게 된다. 내 글에 나오는 당신은, 진짜 당신이 아니었는데.

 

사실 작업의 전모를 밝히는 비평은, 심지어 근미래의 작업에 해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작품을 ‘정념정형(pathosformel)’으로 독해하면, 작업에는 언제나 작가의 정념 이상의 것이 깃들어있음을 보게 된다. 동시대의 정념이 작가의 무의식과 수행을 통해 작업에 스며들고, 역사적 정념이 작가의 관습적 행위와 양식과 상징 변주 등을 통해, 작업군에 시나브로 축적된다. 작가의 작업 세계가 미지의 시간과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려면, 담론과 작업은 (부)적절한 각도로 어긋나야 한다. 작가 본인이 적은 스테이트먼트로부터 도망치는 (준)자율적 작업이, 작가와 작업 세계 모두를 마술적 성장으로 이끈다. 작가가 온전한 정신으로 계획한 바를, 온전한 정신이 이끄는 과정을 통해, 거의 원안 그대로 구현해놓은 작업들만큼 지루한 것도 드물다. 다행히, 이동훈의 작업은, 작가의 계획이나 언어에서 꽤 많이 벗어나 있다. 그것이 배태하는 가능성을, 어느 정도까지 자각하느냐는, 앞으로 중요할 수도 있고, 또 안 중요할 수도 있다. 때로 작업은, 작가를 매개체 삼아 스스로의 가능성을 실현하기도 하므로.

 

작가를 통해 유기적 체계를 발현시키는 작업 세계는, 제 존재의 본성에 상응하는 개요적 형태(abstract form)를 추구한다. 개요적 형태의 특정적 발현태(specific figure of manifestation)는 제각각일 수 있지만, 개요는 관철된다; 작가가 유기적 체계의 흐름이라는 순리에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의사-유기적 체계가 조형으로서 성장을 시작하면, 세대 유전하는 목적(objective)으로부터 형태(form)가 유추되고 구현되지만, 개별 작업들의 활동(activity)과 그를 위한 상황적 목적(purpose)으로부터 다시 모양(shape) 차원의 변주와 구현이 이뤄진다. 그러므로, 작업 시기별로 실현되는 형상(figure)들은, 개체 차원의 존재 목적에 충실한 모양을 갖추고, 또 연대기적 진화 과정에서의 지향에 부합하는 형태를 추구할 때, 그제야 역사적/동시대적 성취의 결절점(node)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그 성취의 접속점을 창출해나가는 삼각법(triangulation)의 과정이, 예술 창작의 경우엔 온전히 이성적 판단에 의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 예술적 망상은, 위대한 비전이, 무의식적 욕망의 작용과 암묵지적 능력의 활용과, 고통스러운 노동과 열락에 가까운 몰입의 순간들과 함께, 마술적 화학 작용을 일으킬 때, 마침내 현실이 된다.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이었던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이동훈은 다양한 주제와 방법으로 그리기를 시도했다고 한다. 개념적이고 시의적인 방법론을 수립하고자 했던 성급함 때문에, 자신의 창작 행위와 의도 등을 회의하게 됐고, 그 회의를 바탕으로 원점에서 새로 출발했다. 2019년부터 그는, 옛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방법을 새롭게 탐구하기 위해 화병 등을 바라보며 실험적 정물화를 그렸던 것처럼, 조각을 통해 회화적 조형을 탐구해보고자 화병 연작의 제작에 나섰다.

 

* * *

 

꽃이나 화병은, 현대미술가들 사이에서 그리 높게 평가되는 탐구 주제물은 아니다. 꽃의 구조적 특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주제물을 회화적으로 재창조해낸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네(Claude Monet, 1840-1926)조차 꽃의 특성을 무시하고 그림을 그렸고, 정물화로는 단 한 점의 걸작을 남기지 못했다. 반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은 정물화에서부터 성취를 거두기 시작했고, 20여 점의 꽤 괜찮은 꽃 정물화를 남겼다. (정물화 걸작들은 대개 꽃 대신 사과를 다루고 있다.) 현대미술 초기의 역사에선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의 화병 그림이 비교적 유명하지만, 역시 걸작으로 칭송될 정도는 아니다.

 

가장 꽃을 잘 그린 현대화가는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다. 고흐의 어떤 꽃그림이 식물의 특성을 잘못 포착하고 있다면, 위작이라고 지목될 정도로, 고흐는 의외로 대상(꽃)을 면밀히 고찰했고, 그림의 조형적 질서를 위해 그 특질을 함부로 뭉개지도 않았다.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도 꽃이 있는 정물을 좀 그렸지만, 수가 그리 많지는 않다. 반면, 1차 세계대전 이후 곧바로 모더니즘의 진보를 부정하고 역사(주의)로 회귀했던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는, 꽃이 있는 정물화를 꾸준히 그렸다. 그리는 방법도, 과거 장르 페인팅의 방법을 제스처로서 구사하는 묘한 성격―거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을 띠었다.

 

그러고 보면,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의 꽃 연작은 참으로 예외적이고, 그에 화답하고자 했던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1939-)와 동료들의 <디너 파티(Dinner Party)>(1974-1979년)도 대단히 특별한 존재다. 특히 저부조와 고부조로 제작된 꽃/음문 모양의 만찬-접시-조각들은 여성적 기념비의 가능성을 탐구한 ‘아름다운 실패’로서, 여전히 특별한 존재 의의를 지닌다.

 

동독 출신의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는, 서독에서 미술학교를 다닐 때 꽃그림을 그리는 동료를 경멸했던 일화로 유명하지만, 1970년대엔 <아틀라스>(1962-2013) 연작에 석 장의 꽃 패널을 추가했고, 1977년엔 한 점의 꽃 사진회화를 그린 뒤, 1992-1994년엔 넉 점의 꽃 사진회화를 추가로 제작했다. 그의 꽃 사진회화들은 모두 미국발 포토리얼리즘에 대한 비평적 대응의 일환이었다.

 

앤디 워홀과 스터트번트의 꽃이야 너무 유명한 경우니,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반면, 로이 릭텐스틴의 꽃 정물화는 미술사를 참조하는 패스티시 수준에서 멈췄다. 하면, 꽃으로 조각을 제작한 현대미술가론 누구누구를 언급할 수 있을까?

 

피카소는 좀 귀여운 화병 조각 연작을 남겼다. <화병에 담긴 꽃(Flowers in a Vase, Fleurs dans un vase)>(1951-1953)은 테라코타 화병과 철심과 석고를 결합한 작업인데, 파티나 처리로 색을 입힌 브론즈 캐스팅 버전들도 존재한다. 어디로 봐도 수작은 아니다. 반면, 클래즈 올덴버그(Claes Oldenburg, 1929-)는 최근에 멋진 꽃 작업을 하나 제작해 발표했다. 먼저 세상을 뜬 미술사학자 부인 코셔 판 브뤼헌(Coosje van Bruggen, 1942-2009)과의 협업으로 소개된 <떨어진 부케(Dropped Bouquet)>(2021)는, 미국식 초현실주의의 망상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제프 쿤스에게 누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증언한다.

 

니키 드 상 팔(Niki de Saint Phalle, 1930-2002)은 거대 괴물 꽃 조각을 제작했을 것만 같으나, 의외로 스케치만 남겼을 뿐이다. 정말로 괴물꽃이나 대형꽃을 조각으로 제작한 사람은,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 1929-)와 쿠도 테츠미(工藤哲巳, 1935-1990)와 이자 겐츠켄(Isa Genzken, 1948-)과 최정화(1961-) 정도다. 제프 쿤스도 꽃조각은 대형 버전이 없다. 다 소품인데, 그나마 <큰 화병(Large Vase of Flowers)>(1991)은 작가의 대표작이다.

 

예외적인 경우로는, 데시가하라 소후(勅使河原蒼風, 1900-1979)의 아방가르드 꽃꽂이 방법론을 따르는, 소게츠류 이케바나 작업―“어느 때나, 어디서나, 누구나, 무엇으로든”을 모토로 하는―이나, 스다 요시히로(須田悅弘, 1969-)의 정밀한 채색 목조 꽃 작업들―일본의 채색 목조각 전통을 알리바이로 삼는―을 언급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언급한 현대미술사의 꽃 관련 회화와 조각을 한 자리에 다 모은다고 해도, 위대한 전시가 구성되지는 않을 듯하다. 꽃이라는 주제로 현대미술사의 주요 국면을 하나하나 돌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 * *

 

원점에서 새로 출발하기 위해 화병이라는 탐구 주제물을 선택한 이동훈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나 프로토-큐비스트 시기의 피카소처럼, 대상을 고찰하되, 고찰한 바를 뇌내 추창조(追創造, nachschaffen) 과정을 통해 변형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눈속임적 재현을 부정한 20세기 현대미술의 대전제에 부합하는 회화적 조각의 조형을 1차 귀결 지었다. 노동 집약적 과정을 통해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분석적 형태를 찾고, 또 물성을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색을 입히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작업하는 즐거움을 되찾았다. 재료의 제약과 조각 작업에 대한 무지 덕분에 그는, 개념적 전제에 맞춘 회화 작업들에서 맞닥뜨리던 관습적 그리기의 수행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칠게 조각된 나무의 물성과 형태를 전제로 한 그리기 행위는, 기존의 평면적 표면/지지체에 전개하던 그리기 수행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다. 매스에 채색을 적용할 때 영역의 구분을 더 명확히 할 수도, 영역의 구분을 새로이 창출할 수도, 실존하는 영역의 구분을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은폐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채색을 조각적 형태와 조화시킬 때마다, 채색 부분의 밀도나 외곽선(contour)은 흥미로운 이슈가 됐다. 조각적 형태와 채색을 ‘불균형의 균형(off-kilter balance)’을 통해 조화시키는 방법을 통해, 작가는 참조적 신추상으로 나아가는 길과 비재현적 신구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 모두를 확보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이동훈이 회화적 조각가로서, 형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고양이나 새나 뱀 등을 소환했다는 사실이다. 길고양이들을 보살피기도 하는 작가는, 고양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미술사적 연결고리로서 과잉 독해되는 걸 막아주거나, 지나친 개념적 알레고리가 형성되는 걸 예방해준다고 생각했다. 화병과 고양이, 어찌 생각해보면, 거의 텅 빈 기호로서의 밈―그것도 망해버린 텀블러 시대의 밈 이미지―에 가깝지만, 아무튼 작가는 이 형상들을 통해 마음의 부담을 덜고 작업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한데, 노동집약적 작업은 한국인의 세계관이나 정서상 작가 본인에게 만족감과 자부심을 선사하는 경우가 많다. 장시간의 몰입 작업을 통해 실제로 물아일체와 무념유상의 가치가 구현되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무념무상의 경지를 말하는 작가들이 있지만, 사실 그런 미술은 없다. 파상적념(破象寂念)의 미술이 가능할 따름이다. 현명한 작가는 무념유상의 미술을 지향-고수하지만, 어차피 유념무상의 부류로부터 구별되기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부류는 허상적념/허조정념-적념허상/정념허조의 미술을 일삼는 이들. 아무튼, 종교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다스려본 경험이 없다고 해도, 또 이성적 사고를 추구하는 무신론자라고 해도, 노동집약적 작업을 진행해본 작가라면 누구나, 일심정념(一心正念: 마음을 하나로 모아 기도하기)의 과정을 통해 적념(寂念: 번뇌를 벗어나 몸과 마음이 흔들림 없이 매우 고요한 상태의 생각)에 이르는 방법을 알고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경험에 중독되면, 몸이 일찍 망가지는 수도 있다는 것. 이동훈의 경우에도, 자신의 노동집약적 작업에 중독되는 현상이나 징조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동훈의 회화적 목조각들은, ‘일심정념의 과정을 통해 적념에 이르는 조형’의 전형이지만, 과거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양식미를 이루고 있기에, 다소간 묘한 성격을 띤다. 외형적으로야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 1938-) 등의 신표현주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고, 또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1916)의 몇 안 되는 청기사파 조각 작업들을 부지불식간에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뵈기도 한다. (프란츠 마르크가 양차대전 사이에 건강하게 살아서 조각 작업을 전개하고, 또 그에 특유의 채색을 더했다면, 어떤 과결이 나왔을까 상상해보자.)

 

그러나, 이동훈의 목조 작업들에선 ‘21세기의 민예’라고 봐도 좋을 것만 같은 ‘구수한 큰 맛’이 느껴지고, 또 어딘지 모르게 현대판 애니미즘의 정령이 깃든 ‘비종교적 신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마다 다 감흥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동훈의 작업을 처음 봤을 때, 야나기 무네요시가 열심히 조사하고 수집했던 모쿠지키불(木喰佛)이나, 그보다 연대가 앞서는 엔코불(円空佛)을 떠올렸다. (누군가 21세기 엔코불을 제작하되, 그에 채색을 더한다면, 어떤 아름다움이 구현될 수 있을까?)

 

대개의 경우, 작가는 제재소에서 3m 60cm 높이의 잣나무를 구매해 통으로 혹은 적당히 절단해 작업했다. 통나무의 가격은 개당 25만 원인데, 배송비 5만 원은 별도. (조각가 김세일 교수에게 선물로 받은 느티나무로 제작한 작업이 있기는 한데, 대단히 단단한 재료라 손목에 크게 무리가 갔다고 한다.) 채색 재료로는 보통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다.

 

2019년 10월의 첫 개인전 <꽃이 있는 실내(Room with Flowers)>(20191017-1123, 드로잉룸)에서 선뵀던 목조 작업들, 즉 <선인장> <목련이 있는 화병> <화병> <화병> <플라밍고와 풀> <고양이와 박새와 풀> 등은, 회화 작업으로 훈련된 청년 미술가가, ‘익숙하지 않은 조각 작업을 통해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은’ 성과를 제시하는 동시에, 현대미술로서의 조각과 회화를 혼합 재창안한 결과로서, 대단히 자명한 ‘구수한 큰 맛’의 양식미―거의 울트라-버내큘러 미학에 가까운―를 발하고 있었다.

 

문제는 회화 작업들. 완성한 조각들을 모델 혹은 정물 삼아 다시 캔버스 회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그간 몸에 익은 습관들에 다시 발목이 잡혔다. 미술학교-미술 특유의 성실한 재현은, 회화적 목조 작업들의 성취에 대비되는 태작들을 낳았다. 예외적 방식으로 유기적 자율성을 획득한 회화적 목조 작업들이, 일종의 준-생명체로서 토템적 현존성을 띠는데 반해, 그를 모델 혹은 정물 삼아 그린 그림들은 특별할 것 없는 초상화처럼 뵀다. 현대적 시선을 축적하는 정물화가 됐어야 했지만, 어디로 봐도 완성된 그림들은 구식 초상화였다.

 

세잔의 인물화와 풍경화가 사실상 정물화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있다. 정물화를 통해 일안 원근법적 재현의 한계를 벗어나는 양안 시각의 회화적 구현을 깨우친 이래, 세잔은 풍경화-인물화-수욕도로 연결되는 점진적 성취의 대장정에 나설 수 있었다. 세잔이 시각에 반응하는 촉각적 붓질의 중첩을 통해, 대수욕도 연작에서 현대미술의 시원으로 간주되는 새로운 회화적 시공을 창출해냈다는 사실은, 로댕으로 하여금 시각에 반응하는 촉각적 소조 작업의 중첩을 통해, 현대조각의 시원으로 간주되는 <지옥의 문>을 제작하도록 만들었더랬다. 그러므로 이동훈은, 그 반대의 영향 관계, 즉 1900년의 로댕―알마전시관(The Pavillon de l'Alma)에서 백색의 석고 모형들로 제작 과정과 방법을 강조했던―으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회화를 망상해볼 필요도 있다.

 

* * *

 

2020년 8월 미술학석사 학위논문 <재료와 표현 사이>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한 작가는, 회화적 목조 작업으로 꾸준히 성장세를 지속하는 가운데, 그를 모델 혹은 정물 삼아 그린 그림들에선 꾸준히 실패를 반복해왔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2021년 들어서 정물 조각에서 벗어나 인물 조각을 시도하게 된 작가는, K팝 아이돌과 그들의 무용 동작을 탐구 주제물 삼아, 새로운 회화적 조각을 시도했다. 문제는 인체와 그 동세를 포착하는 작업이, 움직이지 않는 정물에서와는 다른 분석적 재구축을 요구했다는 것. 2021년 4월의 그룹전 <사람 모양 재료>(20210417-0508, 라라앤)에서 처음 선뵌 인체 조각들은, 정물 조각에서와는 달리 유기적 자율성을 획득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동훈은 빠르게 그 한계를 극복해냈다. 두 번째 개인전 <조각이 춤도 추네요(The Statue Knows How to Dance)>(20210708-0731, 갤러리SP)에서 선뵈는 아이돌 조각들은, 부처 대신 K팝 스타들의 현존을 구현하는 21세기판 다채색 엔코불로 뵌다. 한데 그것이 동세를 포착하려 애쓰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아이돌의 춤은, 극장 무대용은 아니다. 관습화된 카메라의 시점에 맞춘, 화면용 춤이다. 공연장에서 그 안무를 변형해 추기도 하지만, 이미 팬들은 객석에서조차 방송국 카메라의 (준)전지적 시점으로 공연을 감상한다. 하면, 오늘의 미술가는 ‘미디어에 의해 재매개되는 것을 전제로 안무된 춤’을 어떻게 준자율적 조형 질서로 옮길 수 있을까?

 

춤추는 조각 연작은, 아이돌 그룹의 특정 히트곡과 함께 제시된, 소위 ‘포인트 안무’ 수행을 다룬다. 잇지의 예지, 에스파의 카리나, NCT의 태용과 제노, 브레이브걸스의 유정 등 특정 인물을, 특정 히트곡으로 활동하던 시기의 모습으로, 즉 당시의 대표 의상 가운데 하나를 입은 모습으로 다루고 있지만, 진짜 핵심은 후크업 라인에 결부된 ‘포인트 안무 동작’과 그 해석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개막 당일 갤러리의 기둥에 부착해놓은 나오토 후카사와의 CD 플레이어엔, 엔시티 드림의 앨범 <맛(Hot Sauce)>[2021]이 끼워져 있었다.)

 

다음의 인스타그램 전시 관람평은, 그 다층적 핵심을 완벽하게 포착했다: “이어폰도 안 끼고 있었는데, 환청처럼 케이팝이 들렸다. 회화적 조각과 조각적 회화를 이어주는 것들, 이를테면 아이돌 무대 의상의 패턴이나 안무, 특히 손/발짓의 모양새를 떠올려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리듬을 타고 있었음. 이른바 사일런트 케이팝.” - 김호원(@kmhown)

 

세잔 이후 야수파가 나오고 입체파가 뒤를 잇고 미래파가 나타났던 과정을 생각해보면, 이동훈이 아이돌 조각에서 전개할 수 있는 실험적 변주의 폭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즉,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뜻. 일단 인체 조각 작업을 개시하면, 결국 언젠가는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1884-1889) 같은 군상 작업과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1880-1917)과 같은 종합으로서의 미완성 작업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데, 이번 두 번째 개인전에서 선뵈는 회화 작업들은 예전의 초상화적 회화의 한계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작가는 완성한 인체 조각을 여러 시점에서 (재)고찰하며, 비재현적 다중시점의 평면으로 확산하는 반추상 회화들을 완성했다. 빠른 필치로 슥슥 무심하게 그려나간 화면들은, 일안원근법적 재현의 습관을 털고, 동세의 궤적을 축적하는 성취를 거뒀다. 비로소 작가는 자신의 회화적 조각을, 고찰하는 이의 움직임을 전제로 한 동적-정물(모순적 표현이 되지만)로 삼아, 무한히 확장할 것만 같은 준자율적 회화를 도출해냈고, 이제 회화적 조각과 조각적 회화는,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는 단계에 이르렀다. ///

 

추신) 이동훈의 회화적 조각은, 동세 탐구와 시점 축적의 차원에서 더 멀리 나아가야 마땅하고, 그에서 파생된 조각적 회화는, 확장하는 다중 시점의 장으로서 더 크게 혹은 더 부조적으로 진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회화와 조각이 상호 결합하는 장면은, 가능하면 십 수 년 뒤에 보고 싶다.

 

추신2) 한국의 현대/동시대 문화를 가로지르는 특질이, ‘불균형의 균형’과 ‘충돌과 부조화의 역동성(the dynamic of collision and dissonance)’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면, 이동훈의 신작들은, 지극히 한국적인 울트라-버내큘러 아트, 즉 21세기 초(超)-민예의 사례로 뵈기도 한다. 현대미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누군가에겐 모욕으로 들리겠지만, 사실 미술가의 미술이 꼭 현대미술일 필요는 없다. 현대미술과 현대미술계가 공히 망해도, 특별한 시점과 정념을 응결시켜놓은 비현대미술 혹은 인공물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제 존재 의의를 입증할 터.